印君㵯洙는 우리 고향의 훌륭한 선비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부께서 선행이 많으나 하나도 전해짐이 없어서 비문에 새겨 전코자 한다.”며 나에게 글을 부탁하거늘 내가 그 사람이 아니어서 여러 번 사양해도 굳이 청해 오니 참으로 孝孫이라. 차마 그 뜻을 외롭게 하랴. 이에 살펴오니 公의 姓은 印氏요、이름은 熙培、字는 敏秀요、喬桐人이다. 일찍이 文科에 올라 한림학사 문하시중 교수부원군을 지낸 邠의 후손이요、첨의평리병마사 석성부원군 ‘당’의 十九代孫이요 판밀직사사 ‘원보’의 十六代孫이요.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廷珍의 七代孫이다. 父는 榮源(字는 汝行}이니 증직 숭정대부 판돈녕중추부사로 시호는 孝靖이요、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성주배씨이다. 公은 고종 계유년 十一월十五일생으로 호는 槐堂이요. 벼슬은 순릉참봉 중추원의관 경선 先聖廟 直員이다. 公께서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 힘써 배워서 문학에 능하고 또 많은 善行이 있으니 이를 모두 쓰지 못하고 그 대강을 적는다.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는 크고 적은 일이라도 반드시 여쭙고 실행하여 독단이 없었고 내 몸만을 위하지 않았다. 부친상에 이르러서는 모든 장례절차를 예법에 의하여 부족함이 없었고 또 어릴 때 돌아가신 모친을 위하여 장성후에 三년상을 받들어 시행하매 조석으로 성묘하매 삼옷이 헤어졌고 八년간 先山을 구할 때 名師의 말에 따라 집 뒤에 정하니、이곳은 부모내외분께서 조모를 위해 기도하던 곳이었으니 이 어찌 우연이리요、이는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公의 부친은 서기 一九二七년(정묘년에 전국유림의 상신으로 효자 정문과 시호를 받았고 모친 배씨의 효부정문도 같은 해에 덕산면 낙상리에 세워졌으니 이것은 효행에 힘쓴 나머지 받은 나라의 恩典이다. 이제 신진문명이 홍수처럼 들어와서 一九一五년(乙卯年)에 덕산공립보릉학교가 개설됨을 보시고 公께서 깨닫게 되어 아들 鍾九릍 입학시켰다. 그 후 十一年 지나 丙寅年에 私財릍 들여서 錦川私塾을 만들어 아들 鍾九에게 敎師를 말겨 三年制로 청소년 百여명을 교육시킬 때는 학용품을 무상 증여하였고 二年후 戊辰年 三月에는 이것이 樂上學術講習所로 인가받았고 그 후 六년이 지나 甲戌年에 ‘수덕간이학교’로 승격인가를 받고 그 후 四년째 戊寅年에는 ‘수덕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되어 덕산면 외나리로에 옮겨졌으니 그 권학지 공이 지대할 뿐 아니라 일찍이 영농개선에 뜻을 두어 솔선수범으로 청소년을 지도하였고 농한기에는 새끼꼬기、가마니짜기를 일선 지휘하여 매년 늦가을에는 私財를 들여 경진대회를 개최하여 타 부락에 시범을 보이셨다. 公께서 신사년 十一월 二十五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六十九세요、부인은 宜人順興安氏로 두 아들을 두시니 장남은 鍾曙요、차남은 鍾九이다. 公의 이렇게 많은 善行을 찬양치 않으면 이것은 후세의 모범을 막는 것이다. 이에 비석에 새겨서 후세에게 이를 본받기를 권장하노라. 서기 一九八三년 계해 十二월 前해미향교 李應珪 지음 덕산향교 전교 韓泰安 손자 㵯洙 得洙 競洙 忠洙 光洙 璟洙 증손 群植